화석연료를 기반으로 20세기 거대한 부와 권력을 쌓아온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클린 에너지 혁명’으로 세계적인 탈탄소 흐름에 팔을 걷어붙였다.
세계 에너지 시스템에 토대가 된 화석연료는 현대 경제 성장의 일등공신으로 꼽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전례 없는 환경적 파괴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전 세계가 기후변화를 억제하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 실현을 약속한 핵심에 에너지 부문의 혁명과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이 있다. 에너지 부문이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글로벌 에너지 업계의 ‘클린 에너지 혁명’은 당연한 귀결이다.
과거,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고려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경제였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따른 막대한 비용과 수많은 일자리 보상 문제 등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국제 사회가 기후변화를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면서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꼽혀온 에너지 업계도 더는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에너지 업계는 석유와 가스 생산 감축 계획을 잇따라 발표하는 한편, 태양열과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아울러 천연가스와 탄소 배출 저감 기술 개발에도 열을 내고 있다.
◇‘그린수소’ 선택한 유럽 정유업계…태양열·해상풍력 집중기후변화 대응을 경영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유럽 정유사들은 ‘그린수소’를 선택했다. 그린수소는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으로 물을 전기 분해해 생산한 수소다.
수소는 교통과 산업의 잠재적 청정 에너지원으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 천연가스에서 추출했기 때문에 ‘회색 에너지’란 지적을 받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현재 화석연료로 만들어지는 수소 생산으로 약 8억3000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있다고 추산했다.
가장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는 유럽의 대표 정유사로는 영국 BP를 꼽을 수 있다. BP는 향후 10년간 배출가스 저감 사업 투자를 현재의 10배인 연간 50억 달러(약 5조6500억 원)로 늘리고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은 40%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스페인 최대 에너지기업인 렙솔도 2030년까지 석유사업 운영을 줄이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5배 늘린다는 계획을 최근 발표했다. 렙솔은 2025년까지 7.5GW, 2030년까지 15GW의 발전용량을 갖춘 글로벌 재생에너지 사업자가 되겠다는 목표다. 이는 현재 렙솔의 재생에너지 발전용량인 3GW 남짓에 비해 대폭 확대된 수치다.
로열더치셸, 이탈리아의 ENI, 프랑스의 토탈, 노르웨이의 에퀴노르도 렙솔과 비슷한 목표를 정했다. 일부 회사는 새로운 에너지 투자를 위해 배당을 삭감하기도 했다.
BP는 독일 북서부 링겐 지역에 있는 정유 공장에 그린수소 생산 시설을 세워 북해 오스테드에서 운영 중인 해상풍력발전소에서 만든 전력으로 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 50㎿(메가와트)급 전기분해장치를 설치해 연간 약 9000톤의 수소를 생산키로 했다. 현재 이 시설은 천연가스로 수소를 만들고 있다. BP는 이 공장의 회색수소 20%를 그린수소로 교체해 매년 차량 4만5000대 사용분의 배출량을 저감하는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르웨이 에퀴노르는 세계 최초로 이산화탄소 배출이 없는 100% 수소 화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 에너지 기업 SSE와 함께 영국 험버 지역에 두 개의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지난 4월 발표했다. 900㎿급 수소 화력발전소 2기를 건설해 1.8GW의 전력을 생산할 예정이다.
영국·네덜란드계 정유사인 로열더치셸도 풍력·태양광·수소 등 비석유 부문에 집중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벤 반 뷰어든 로열더치셸 최고경영자(CEO)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석유·천연가스 사업 비중을 60%로 낮추고 재생에너지 사업 비중은 30%까지 늘리는 게 목표”라며 “수년 안에 대규모 수소 프로젝트가 가시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열더치셸과 에퀴노르는 네덜란드에서 10GW 이상의 해상풍력 기반 그린수소 프로젝트를 논의 중이다.
◇미국 정유업계는 탄소포집·저장(CCS) 기술에 주목미국 정유사들은 이윤이 낮은 재생에너지보다는 천연가스와 신기술 개발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저장하는 ‘탄소포집·저장(CCS)’ 기술이다.
CCS 기술은 탄소를 포집한 후 지하나 심해에 매장하는데, 특히 석유 기업은 이를 활용해 이산화탄소를 공동(空洞)이 생긴 노후 유정에 주입하고 잔존 석유를 효과적으로 추출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CCS 시장은 2040년 약 2조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글로벌CCS연구소의 2020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까지 전 세계가 탄소중립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선 3.6기가톤 규모의 이산화탄소 포집·저장 용량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2019년 기준, 글로벌 CCS 시설 용량은 40메가톤에 불과해 향후 100배 이상의 시설 확장이 필요하다.
이에 미국 최대 석유업체인 엑손모빌은 올해 3월 탄소포집 신사업부를 만들었다. 세계 최대 탄소포집 업체이기도 한 엑손모빌은 지난해만 해도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관련 기술 도입과 시장 환경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후변화를 ‘사기’라고 주장하며 화석연료 탐사를 위해 환경 규제를 폐지하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올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기후변화 위기 대응을 꼽았고,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친환경 에너지 전환과 관련 기술 도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 분위기를 타고 엑손모빌은 올해 초 ‘엑손모빌 저탄소 솔루션’ 사업부 구축에 돌입했고, 2025년까지 30억 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미국 석유 메이저 중 하나인 옥시덴털페트롤리움 역시 CCS 기술을 활용해 ‘204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탄소포집 사업이 10~15년 내 석유화학 사업 만큼의 현금 흐름을 창출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또 다른 정유사 셰브론은 탄소를 포집하고 격리해 대기 중에 배출되지 않도록 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 11억 달러를 투자했다. 벤처 캐피털 자회사인 셰브론벤처스를 통해서는 핵융합기술 스타트업인 잽에너지에 투자했다. 잽에너지는 배출가스가 전혀 없고 방사성 폐기물이 적은 소형 핵반응로를 개발하고 있다.
바이오 디젤에 집중하는 정유사도 있다. 필립스66와 매러선페트롤리엄, 홀리프런티어 등이다. 바이오 디젤은 식물성 기름이나 동물성 지방을 원료로 해서 만든 바이오 연료로, 바이오에탄올과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된다. 필립스66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정유공장에 8억 달러를 들여 바이오 디젤 생산 공장으로 전환키로 했다. 2024년부터 바이오 디젤을 연간 약 6억 갤런(약 1429만3562배럴) 생산하는 게 목표다. 이는 세계 바이오 디젤 공장 가운데 최대 규모다.
매러선페트롤리엄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정유공장을 바이오 디젤 공장으로 바꾸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고, 홀리프런티어는 지난해 와이오밍주에 있는 정유공장 한 곳을 폐쇄하고, 이를 2022년까지 바이오 디젤 생산기지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