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 대한 절박함이 글로벌 정유업계의 비즈니스 모델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국내 정유업계도 마찬가지다. 해외 정유사들이 바람과 태양에서 미래 먹거리를 찾겠다고 나서는 가운데, 국내 정유업계는 ‘K-그린’을 화두로 내세워 탈탄소 시대에 대응하고 있다. ‘K-팝’이 한류 문화 전파의 일등공신이라면, 대한민국의 녹색 성장은 정유업계가 선도하겠다는 것이다.선진국에서는 ESG 경영을 강제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환경 규제 수위가 날로 높아지고 있고, 이를 이용한 무역장벽도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국내에서도 소비자가 재생에너지 전기를 선택적으로 구매·사용할 수 있는 ‘한국형 RE100(K-RE100)’ 제도를 도입하는 등 환경 규제 문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한다는 정부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인위적 온실가스 배출량의 9%를 차지하는 에너지 산업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박의 목소리가 거세다. 정유업계는 그동안의 밥줄이었던 화석연료와 탄소를 배제하고도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려야 하는 상황. 업계는 ‘ESG’와 ‘그린’을 키워드로 한 과감한 경영 혁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SK이노베이션 스토리 데이(Story Day)' 행사에서 김준 총괄사장이 중장기 핵심 사업 비전 및 친환경 전략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탄소에서 그린으로...회사 정체성까지 바꾼 SK이노베이션지난 1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 국내 최초 정유사로 출범한 SK이노베이션은 전체 경영진이 참석한 자리에서 회사 정체성을 탄소 사업에서 그린 중심 사업으로 완전히 바꾸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K-그린’을 앞세워 대한민국의 친환경적인 면모를 세계에 보여주겠다는 올 초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은 신성장 동력인 배터리 사업과 배터리 핵심 소재인 리튬이온배터리분리막(LiBS) 등의 소재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정하고 포트폴리오를 혁신했다. 현재 약 130조 원 규모인 배터리 수주 잔고에다 앞으로 5년 간 총 30조 원을 투자해 친환경 사업 비중을 30% 수준에서 70%까지 늘리기로 했다. 배터리분리막 생산 규모도 현재 14억㎡에서 2023년 21억㎡, 2025년 40억㎡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배터리 분리막 사업 자회사인 SKIET는 2023년까지 증평, 폴란드, 중국 창저우 등 국내외 LiBS 공장에서 총 18억7000㎡ 분리막 생산 능력을 갖춰 글로벌 생산능력 30%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다.
폐배터리 재활용 사업도 강화한다. 내년 중 재활용 배터리의 시험 생산을 시작해 2025년 기준 연간 30GWh의 배터리를 재활용해 이 사업에서만 약 3000억 원의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을 창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폐배터리에서 배터리 원료인 수산화리튬을 회수하는 기술을 자체 개발, 54건의 관련 특허를 출원했다.
친환경 제품 비중도 늘려나간다는 방침이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화학 사업 자회사인 SK종합화학은 ‘리사이클 기반 화학사업회사’로 전환, 폐플라스틱 리사이클 사업을 대폭 강화한다. 2027년까지 국내외에서 생산하는 연간 플라스틱 물량 250만t을 100% 재활용하고, 친환경 제품 비중을 100%까지 확대키로 했다.
김준 총괄사장은 “SK이노베이션의 그린 전략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화석연료 사용에 대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라며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회사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블루’·‘화이트’에서 미래 찾는 현대오일뱅크현대오일뱅크는 ‘탄소중립 그린성장’을 선언했다. ‘탄소중립 성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미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현재 수준보다 대폭 줄인다는 전략이다. 이 일환으로 현대오일뱅크는 재생에너지(RE)와 친환경 사업 확대로 현재 85%인 정유사업의 매출 비중을 2030년까지 40%대로 축소한다는 ‘비전2030’을 내놨다. 블루수소와 화이트 바이오, 친환경 화학·소재 등 3대 친환경 미래사업이 목표 달성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현대오일뱅크는 글로벌 수소기업 에어프로덕츠와 ‘수소 에너지 활용을 위한 전략적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에너지·석유화학 분야 세계 최다 특허 보유업체인 허니웰 UOP와 ‘RE 플랫폼(Renewable Energy·친환경 에너지 플랫폼) 전환을 위한 기술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블루수소는 화석연료가 수소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탄소를 제거한 친환경 에너지이며, 화이트 바이오는 옥수수와 콩, 목재류 등 재생 가능한 식물 자원을 원료로 화학제품이나 바이오 연료 등을 생산하는 기술이다.
현대오일뱅크는 2025년까지 블루수소 10만 톤을 생산, 판매할 계획이다. 에어프로덕츠의 제조 기술을 활용, 저렴한 원유 부산물과 직도입 천연가스로 수소를 생산해 원가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생산한 수소는 자동차와 발전용 연료로 공급되며 탄소는 별도 설비를 통해 친환경 건축자재인 탄산칼슘과 드라이아이스, 비료 등으로 자원화된다.
올해 말 상업 가동을 목표로 태양광 패널과 전기차 분리막 소재 등 다양한 친환경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한 HPC(Heavy feed Petrochemical Complex)를 건설 중인 현대오일뱅크는 기존 정유공장에서 석유제품 대신 납사 등 화학제품 원료를 최대한 생산해 HPC에 공급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허니웰 UOP의 하이브리드 COTC(Crude Oil To Chemical) 기술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GS칼텍스는 비즈니스 밸류 체인(Business Value Chain) 전 과정에서 순환경제(Circular Economy)와 연계해 지속 가능한 미래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친환경 원료 생산을 늘려 석유화학 업사이클링(upcycling)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미 폐플라스틱 재활용 소재로 만들어진 친환경 복합수지 생산량이 전체 복합수지 생산량의 10%를 넘어섰다. 이를 통해 이산화탄소를 연간 6만1000톤 줄일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소나무 930만 그루를 심은 것과 같은 효과다.
GS칼텍스는 2010년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친환경 복합수지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친환경 복합수지 연간 생산량은 2만5000톤으로 초기 생산량에 비해 2.5배 이상 증가했고, 연간 생산능력은 30만 톤에 이른다. 이는 준중형차 60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준중형차 1대를 제작하는 데는 약 50㎏의 복합수지가 들어간다.
GS칼텍스 관계자는 “기존의 채굴, 사용, 폐기에 의존하는 자원 소모적 방식은 한계에 직면했다”며 “폐기물 최소화에 따른 효율적 사용으로 자원순환 비율을 높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업사이클링이 필수가 됐다”고 설명했다.
GS칼텍스는 온실가스 및 대기 오염물질 저감을 통한 ESG 역량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생산 시설에 대한 에너지 효율화를 꾀하고 있다. 작년부터 여수공장 생산시설 가동용 연료인 저유황중유(LSFO)를 전량 액화천연가스(LNG)로 바꿨다. LNG는 동일한 열량에도 LSFO보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다. 중유는 테라줄(TJ) 당 약 76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반면, 천연가스는 56톤으로 74%에 불과하다.
GS칼텍스는 생산 시설의 에너지 효율화로 이산화탄소를 19% 이상 감축, 온실가스 배출 규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GS칼텍스는 또 모빌리티 사업에도 주목, 주유소를 미래형 에너지 모빌리티 허브로 혁신시키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인텔리전트 플랜트를 위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친환경 제품 수요 증가에 따른 친환경 사업을 강화하는 등 미래를 위한 준비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탄소경영 글로벌 인증 받은 S-OIL, 녹색경영 가속 페달2012년 국내 기업 최초로 글로벌 탄소경영 인증(CTS)을 받은 S-OIL은 이를 계기로 녹색경영에 가속페달을 밟아왔다.
S-OIL은 기존 정유·석유화학·윤활 사업의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연료전지·리사이클링 등 신사업 분야로의 진출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특히 신사업 분야 중 하나로 수소의 생산부터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수소산업 전반의 사업 진출을 계획 중에 있다.
이를 위해 대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업체 사우디아람코와의 협력을 통해 그린수소, 그린암모니아를 활용한 사업 및 액화수소 생산·유통사업 등을 검토 중이다. 또 서울 시내에 복합 수소충전소 도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버스·트럭의 수소 충전 인프라 구축을 위해 설립된 특수목적법인 코하이젠(Kohygen, Korea Hydrogen Energy Network)에 참여했다.
올해 3월에는 연료전지 기반으로 청정에너지 솔루션을 제공하는 FCI 지분 20%를 확보, 국내 최대주주에 오름과 동시에 수소산업 진입을 위한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FCI는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 특허를 보유한 한국-사우디 합작기업이다. FCI는 이번 투자로 2027년까지 최대 1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100㎿ 이상 규모의 생산설비를 구축하고 그린수소 사업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할 예정이다.
알 카타니 S-OIL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투자는 수소경제 전반에 대한 투자의 시작으로 회사의 지속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정부에서 추진하는 탄소 저감 노력에도 적극 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S-OIL은 FCI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연료전지 시장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연료전지는 수소를 공기 중 산소와 화학 반응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장치로 수소 경제에 핵심적인 장치이다. 화력 발전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높으며, 화학적 연소반응이 없고 온실가스 저감 효과가 있어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FCI는 중동시장의 기후 조건과 법적 규제에 맞는 발전용 및 건물용 제품을 개발 중에 있다.